나는 둘째를 원하지 않았다.
첫째 아들을 키우면서, 너무나도 행복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
단순히 육아의 짐이 무거워서가 아니었다.
내가 더 좋은 아빠가 아니라는 자책감에서 비롯된 마음의 짐이 나를 힘들게 하였다.
아이가 어린이집 가기 싫다며 울 때, 아내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었다면 여유있게 “그래 오늘은 엄마랑 놀아” 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집안 경제를 위해 사랑하는 아내는 나가서 일을 해야 했다.
나도, 아내도 일을 하기 때문에, 퇴근 후 지친 몸으로 활동적인 세 살 남자 아이를 키우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하원하고 돌아오면 집은 늘 어질러져 있었다.
집안 청소와 정리는 커녕 아들 하나 재우기도 벅찬 우리집이었다.
나는 이 집의 가장인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고 미웠다.
경제적으로 더 좋은 가장이 되어 아이와 아내가 더 부족함이 없게 하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를 원한 아내도 원망스러웠다.
나는 우리가 둘째를 키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들 하나도 제대로 된 환경에서 키워내지 못하고 있고 허둥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둘째를 키운다는 것에 있어서 경제적으로도 부담 되었고, 정신적, 체력적 무게감도 짊어지기에 마음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둘째를 원했고, 구했으며, 하나님은 허락하셨다.
이제 만삭의 몸으로 불편해 하며 누워있는 아내와, 그 옆에서 자고 있는 3세된 아들을 보면서 ‘삶이 참 벅차구나’ 하며 또 생각할 때,
하나님이 문득 이런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키우시겠다고.
하나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릇으로 빚으시겠다고.
내가 원하는 모습, 내가 바라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친히 보살피시고 기르시겠다고.
나는 얼마나 내가 교만했는지.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착각했는지, 부끄러워졌다.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했다.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세 번 배반했던 가벼웠던 남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군인의 귀를 베었던 경솔했던 남자.
내 생각에, 베드로는 그렇게 잘 돌봄 받고 자란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 자랐을지는 모르지만, 충동적이었고 성격 급했던 베드로의 부모는, 나보다 더 준비되지 않은 육아를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받으신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간 열정적인 남자였다.
기적을 행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한 용기있는 남자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내가 알고있는 것이 다가 아님을,
하나님의 생각이 내 지식보다 깊고 오묘함을 생각하며,
나는 나에게 주신 삶과 환경에 나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의지하며 담대히 걸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오늘, 사랑하는 가족을 보며, 그리고 부족한 나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집에 들어가는 길에 이 글을 이만 줄인다.
오늘은 아이를 번쩍 들어올리며 더 안아줘야 겠다.
나를 믿어준 만삭의 아내를 더 안아줘야 겠다.
**대전시 유성구에 사는 이하준(가명)님의 글입니다.